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일반적으로 가장 친숙한 분야가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학생 때부터 배운 낭만주의 음악은 베토벤에서 시작하여,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바그너, 리스트, 쇼팽, 말러 등의 음악이 모두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로시니, 베르디, 푸치니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나 차이콥스키나 드보르자크 같은 민족주의적 음악도 실상 낭만주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 거대한 낭만주의가 1900년을 전후하여 막을 내리면서, 우리가 흔히 ‘현대음악’이라 부르는 20세기 음악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의 마지막 작곡가는 누구일까?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는 커다란 무지개 같은 낭만주의 흐름의 마지막에 앉아 있는 대가가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가라니? 스스로 그런 표현을 썼을까? 그렇다. 놀랍게도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영웅의 생애’라는 교향시를 작곡하여, 자신을 마치 영웅처럼 묘사했다. 물론 이 곡이 자신만을 특정(特定)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곡을 들으면 그가 떠오르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사실 젊은 시절의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를 계승한다고 할 수 있는 파격적 내용과 장대한 음향을 특징으로 하는 오페라 ‘살로메’와 ‘엘렉트라’를 연이어 발표하여, 당시 유럽 문화계에 충격을 주어 ‘바그너의 계승자’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으로는 바그너를 넘어 멀리 모차르트 시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장미의 기사’를 써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 ‘아라벨라’ ‘카프리치오’ 등 예술이 가진 다양한 측면과 여러 요소를 종횡무진 대비하고 통합하면서 낭만적 종합예술의 종결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관현악에서도 최고 성과를 이루어, ‘돈 후안’ ‘죽음과 변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 ‘알프스 교향곡’ 등 대작을 쏟아냈다. 그 외에도 여러 실내악곡과 가곡 등으로 생존 음악가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영예와 안정을 모두 차지했다.
그러나 그런 영광스러운 생애에도 씻을 수 없는 오류가 있었으니, 그는 나치 정권에 부역한 것이다. 독일의 위대성과 예술성을 선전하려는 나치는 슈트라우스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는 나치가 만든 선전 기구인 음악국의 총재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슈트라우스의 외며느리가 유대인이었다. 가정을 무척 중시했던 슈트라우스는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는 결국 나치의 눈 밖에 나고, 나치는 그를 가르미슈에 있는 그의 빌라에 연금(軟禁)하였다. 그 빌라는 슈트라우스가 젊은 시절 ‘살로메’로 성공을 거두고 구입한 집으로서, 산을 좋아했던 그의 작업실 창문으로 독일 알프스의 풍광이 펼쳐지는 멋진 곳이다. 그 후로 40여 년 동안 숱한 명작이 이 집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니 연금은 당했지만 슈트라우스는 창작과 사색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덕분에 가까운 뮌헨을 쑥대밭으로 만든 제2차 대전의 참화도 그를 피해서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미군이 가르미슈에 주둔하고, 결국 몇몇 미군이 집에 들어왔다. 총을 겨누며 들어온 미국 병사들 앞에서 놀란 노인은 “나는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의 작곡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장교가 그를 알아보고 병사들의 총구를 내리게 하였다. 밀턴 와이스(Milton Weiss) 중위는 시골에서 음악 교사를 했던 그의 팬이었던 것이다. 미군에게 징발될 뻔했던 슈트라우스 빌라 앞에는 그렇게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설치되고, 슈트라우스와 그의 집은 전쟁 내내 미군의 보호로 무사하였다. 덕분에 빌라 안에는 슈트라우스가 수집한 많은 장서와 악보 등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그 부대 병사 가운데 미국의 오보에 연주가 존 드 란시(John de Lancie)가 있어 슈트라우스에게 자신을 위해 작곡을 부탁하였고, 슈트라우스가 부대원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지어 준 것이 오보에 협주곡이다.
전쟁이 끝나자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협조한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제 그의 사회적 생명은 끝났고 창작의 불씨도 소진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노인이 84세에 다시 펜을 들어서 최후의 걸작을 창작하였다. 그것이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쓴 가곡집 ‘마지막 노래 네 곡(Vier letzte Lieder)’이다.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게 만든 네 가곡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장이 평생을 함께한 자신과 아내의 모습을 그린 관조적 작품이다. 세 곡은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였으며, 마지막 곡 ‘저녁노을(Im Abendrot)’은 아이헨도르프의 시다. “우리는 슬픔도 기쁨도 손을 맞잡고 견디어 왔지. 이제는 방황을 멈추고, 높고 고요한 곳에서 안식을 누리리. 넓고 조용한 평화여, 저녁노을 속에서 우리는 피로로 지쳐 있네. 이것이 아마도 죽음이겠지….” 죽음을 예감한 그는 이 곡을 쓰고 다음 해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55년간 곁에서 그의 모든 영욕을 함께했던 아내 파울리네도 이듬해에 조용히 뒤를 따랐다.
뮌헨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달리면 알프스의 찬 공기가 가슴속까지 들어오는 마을 가르미슈가 나타난다. 그곳에는 슈트라우스 부부가 평생을 살면서 낭만주의의 마지막 걸작들을 생산해낸 슈트라우스 빌라가 낭만주의의 정신을 지키듯이 이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September 28, 2020 at 01:0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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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문화一流] 길었던 영욕의 인생을 마무리한 老예술가의 집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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