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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부터 '노는 언니'까지, 즐거운 파격을 관통하는 코드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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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방송 플랫폼은 실험중

E채널, 여성 체육인 예능 화제
선례 없다는 약점이 강점으로
지상파 ‘되는 공식’ 따르지 않는
유연한 도전 ‘새 공식’으로 등장

방송-유튜브 넘나든 EBS 펭수
유튜브 프로를 TV 편성한 SBS
플랫폼 관성 깨는 실험 이어져

박세리(골프·왼쪽 넷째)를 중심으로 펜싱, 피겨스케이팅, 수영, 배구 등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하는 예능 <노는 언니>가 13일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전세계 시청자들과 만난다. <e채널> 누리집 갈무리</e채널>
박세리(골프·왼쪽 넷째)를 중심으로 펜싱, 피겨스케이팅, 수영, 배구 등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하는 예능 <노는 언니>가 13일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전세계 시청자들과 만난다. <e채널> 누리집 갈무리</e채널>
“그런 프로그램 하나 정도 있으면 좋을 거 같지 않아요? <뭉쳐야 찬다> 같은 프로그램인데, 남자 선수들 말고 여자 선수들 나와서 같이 놀고 떠드는 프로그램. 현정화나 임춘애 선수 나와서 같이 족구를 한다거나.” 몇달 전 동료들과 이런 수다를 떨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프로그램이 근시일 안에 나올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요 몇년 동안 나를 비롯한 동료 평론가들이 참신하다고 좋아했던 예능 프로그램들은 상당수가 정규편성에 실패하거나, 정규편성이 되더라도 시청률을 문제로 일찌감치 문을 닫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현업에 종사 중인 이들이 내게 웃으며 건넸던 말들도 떠올랐다. “평론가님 글에서 지적하시는 바 대체로 다 동의하지만, 확실히 취향이 대중성이랑은 거리가 있으세요.” 그래, 내가 좋아라 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 만큼 무모한 용기를 내는 채널은 아마 없겠지. 그날의 수다는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그런 무모한 용기를 내는 채널이 있었다. <이(E)채널>은 진짜로 여성 스포츠 스타들을 모아 만든 예능 <노는 언니>를 론칭했고, 주변에서 다들 “새로운 시도”, “의미 있는 도전” 같은 수식어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거 또 우리끼리만 좋아하다가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였지만, 다행히 그런 걱정은 조금 내려놔도 좋을 것 같다. 첫 방송을 0.502%(닐슨코리아. 케이블 기준) 시청률로 시작한 <노는 언니>의 5회까지 평균 시청률은 0.539%. 이채널이 인지도나 접근성 면에서 그리 높은 채널이 아니라는 걸 고려하면, 이 정도 시청률은 준수한 편이다. 방송 초반 일반 시청자들 사이의 입소문도 제법 강하게 이는 편이고, 그 입소문은 빠짐없이 호평 일색이다. 13일부터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해외 시청자들과의 만남도 가능해질 예정이다. ______________
‘미생’, 드라마 주도권이 넘어간 순간
소수점 단위 시청률 때문에 다양한 시도들이 좌절되는 세계에서, 어떻게 여성 체육인들‘만’ 우르르 나와서 먹고 자고 노는 예능을 기획하고 밀어붙이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박세리라는 전설적인 국민영웅을 섭외해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는 점이 유효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노는 언니>를 기획한 이채널 방현영 총괄 프로듀서가 <경향신문>과 나눈 인터뷰를 읽다가 답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노는 언니>를 기획했어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시청률이나 채널 데이터를 참고하는데, 참고할 데이터조차 없었어요. 평소 관심 있던 문제를 질러 보자. 만약 기존의 방식을 따랐다면 <노는 언니>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경향신문> 2020년 8월26일치) 채널이 쌓아온 데이터나 선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해 볼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방현영 프로듀서는 2007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해 2011년 제이티비시(JTBC)로 이적했으며, 올 4월 책임 프로듀서 직책으로 이채널에 왔다. 시청률 1%를 기록하면 대박으로 간주되는 채널인 이채널은, 지금껏 그가 몸담았던 회사들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채널 파워도 작은 곳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거 하면 시청률이 잘 안 나온다’, ‘시청률이 나오려면 이런 건 꼭 해야 한다’ 같은 데이터나 선입견, 지금껏 큰 회사에서 일하며 쌓아왔던 자신의 관성, 그리고 성공적인 전례들을 참고해서 따라가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자기 검열로부터. 물론 지상파 채널처럼 거대한 플랫폼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 오랜 역사와 데이터, 노하우가 있고, 기획부터 제작, 론칭, 홍보, 안정화에 이르는 콘텐츠 제작 과정 전체를 총괄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작품을 보다 더 윤택한 환경에서 만들어 더 널리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게 당연하고, 거대 플랫폼은 그걸 가능케 해준다. 하지만 때론 그 노하우와 시스템, 스케일이 새로운 시도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견고하게 굳어진 기존의 시스템이 소재나 제작 방식의 차별화를 가로막고, 플랫폼의 스케일에 맞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은 소소한 실험을 주저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이미 검증된 코드들로 이루어진 안전하고 무난한 기획 위주로 살아남는다. 장점이 단점으로 돌아온 가장 극적인 예는 아마 2014년 방영된 티브이엔(tvN) 드라마 <미생>일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원작 웹툰 <미생>을 드라마로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될 때, 지상파 채널들은 하나같이 ‘러브라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못했다. 한국 시청자들이 아무리 “일터에서 일 안 하고 연애하는 이야기 지겹다”고 말해도, 결국 러브라인이 있어야 드라마를 더 열심히 본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브라인이 작품의 메시지를 훼손할 것을 우려했던 윤태호 작가는 “전형적인 러브라인은 없을 것”이라 약속한 김원석 감독과 티브이엔의 손을 들어줬다. 지금 돌이켜보면 바로 그 순간이 지상파 채널에서 씨제이이엔엠(CJ ENM) 채널들로 드라마의 주도권이 넘어간 순간이었다. 지상파 채널이 기존의 노하우와 시스템, 스케일에 맞추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는 동안, 새로운 걸 선보이고 싶었던 이들은 그걸 가능케 하는 곳으로 옮겨갔다. 물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무작정 안정적으로 구축해 둔 토대를 무너트리고 유동성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플랫폼이 어느 정도의 보수성을 유지하며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노동환경의 연속성을 확보한 콘텐츠 노동자들 또한 좀 더 안정적으로 창작을 할 수 있으니까. 다만 그간 쌓아온 노하우와 시스템이 시대에 뒤떨어진 건 아닌지, 어떤 부분을 지키고 어떤 부분은 과감하게 바꿔야 할지 점검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적절치 않은 기획이란 이유로, 혹은 플랫폼의 스케일이 요구하는 최소 성취 목표를 맞추기엔 너무 소소한 작품이란 이유로 반려되고 편성을 받는 데 실패한 작품들이 있진 않았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최소한 중박이 보장된 안전한 코드로만 일하려 드는 경향이 생긴 건 아닌가? 보다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구축한 토대가 정작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드는 걸 방해한다면, 그건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닐까? ______________
티브이는 얼마나 더 새로워질 수 있을까
다행히 거대 플랫폼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양이다. 그간 시대에 뒤처진 공룡이라는 평을 들어온 지상파 채널들부터 열심이다. 교육방송(EBS)이 ‘펭수’를 앞세워 지상파와 유튜브를 넘나드는 전략으로 거둔 대대적인 성공이나, 최근 론칭한 문화방송 <나 혼자 산다>의 스핀오프 <여자들의 은밀한 파티>가 지상파와 유튜브에 각각 다른 수위로 편집된 에피소드를 공개하며 양쪽 플랫폼을 동시에 공략하는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에스비에스(SBS)는 한발 더 나아갔다. 자사의 온라인 채널 ‘스브스뉴스’ 팀에서 높은 지지와 열성적인 팬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유튜브 프로그램 <문명특급>을, 지상파 추석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한 것이다. 유튜브 채널을 활용해 지상파 채널의 보수적인 관습을 깨는 실험을 감행하고, 나아가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상파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거대 플랫폼들이 오래된 관성을 벗고 새로운 실험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노는 언니> 같은 즐거운 파격을 더 많은 채널에서 만나볼 수 있는 날도 막연한 꿈은 아닐지 모른다. 크고 작은 플랫폼들이 앞다투어 과감하고 기민한 시도를 하며 규모가 아니라 참신함으로 경쟁한다면, 티브이는 얼마나 더 새로워질 수 있을까? 새로운 진지를 짓기 위해서는 때론 오래된 진지를 허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바로 지금이 우리에게 새 진지가 필요한 순간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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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2, 2020 at 02:3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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