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옛 탄광 사택촌의 폐허 앞에 앉은 황재형 작가가 주변을 응시하고 있다.
“제 큰어머니 얼굴입니다. 그 자체로 역사가 됐어요.” 황재형(69) 작가가 가리킨 건 작업대 위 늙은 여인의 거대한 얼굴 그림이었다. 파마한 머리칼이 덮은 이마 위쪽에 살이 뭉개진 자국이 보인다. 남편인 큰아버지가 던진 목침에 맞아 함몰된 흔적이다. 큰아버지는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의 고문을 받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인 얼굴 곳곳이 상처 나고 봉합된 흉터투성이다. 물감 대신 진짜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붙여 형상을 만들었다. 얼굴 아래와 목 부분은 공백으로 남겨 머리만 떠있는 인상이다. 조금 떨어진 벽에는 늙은 남자의 인물상이 있었다. 수심이 깃든 고대의 현자 같은 주름투성이 얼굴과 벗은 가슴팍이 푸른 빛 배경 속에 흐물흐물 녹아들듯한 그림. 바로 자화상이다. 황 작가는 자화상을 올려다보면서 회상했다. 그림이 좋아 전남 보성 고향 집 앞 해변에 나무작대기로 풍경 그리는 것이 유일한 일과였던 소년 시절과, 여순 사건 당시 반란군의 고문을 견디며 거처를 숨겨준 형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검찰청 직원 출신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크레용을 뺏으며 그림을 못 그리게 막았던 아버지가 말년 사업에 실패하고 세상을 버리자 대가 오지호와 강연균의 화실에서 고학하며 결사적으로 배웠던 중고생 습작기, 미대 졸업 무렵 인간사의 본질과 의미를 알고 싶어 광부로 투신했던 청년 화가의 도전 시대, 탄광이 망했는데도 광산촌 사람들을 미술 교육으로 부여잡은 도시문화활동가로 나선 이력도 스쳐간다. 그렇게 40여년간 황 작가의 리얼리즘 회화 속에서 죽음과 삶은 엉클어져 덩어리 혹은 상흔 같은 흔적들로 날아와 화폭 위에 박히곤 했다.
태백시 문예1길에 자리한 황재형 작가의 작업실 내부. 최근 심혈을 기울여 완성 단계에 이른 <톱을 간다> <추전역> 등의 머리카락 작품들이 보인다.
지난 25일 옛 광산촌이었던 강원도 태백시 문예1길에 자리한 황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연화산 아래 2층 아틀리에 작업실에서 맨 처음 눈을 때린 것은 영계에 머물러 있을 법한 그의 자화상. 그리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대번에 떠올리게 하는 큰어머니의 머리카락 그림이었다. 작업실을 찾아간 건 지난 4월3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초대전 ‘회천’(回天)에 얽힌 궁금증 때문이다. 화가 황재형은 1982년 9월 태백 광산촌에 내려간 이래로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자신의 작업과 현장 미술활동을 하면서 한국 현대 사실주의(리얼리즘) 회화의 우뚝한 봉우리가 됐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이제 생태와 문명, 역사로 눈돌리며 원숙한 리얼리즘의 경지를 추구하는 황 작가는 이른바 ‘광부 화가’ ‘탄광촌 회화’ 등으로 불리며 큰 울림을 일으켰던 1980년대 명작들을 비롯해 2010년대 이후까지의 주요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내걸었다. 1980년대 태백, 사북, 고한 등 탄광지대의 탄부들과 가족들의 모습, 그들의 거처인 사택촌과 탄광촌이 당대 그림과 2000년대 그림으로 복기됐다. 그 일대의 아름다운 백두대간, 산하 등과 어울린 풍경화들은 반향이 컸다. 관객 가운데 우는 사람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 심지어 절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1982~83년 태백시 태영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할 당시 황재형 작가. 막장으로 들어가는 탄차 앞에 앉아서 찍었다.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탄광 입구에서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는 1980년대 초반 광부 시절의 황재형 작가(왼쪽에서 세 번째).
탄광 막장에서 석탄 원석을 퍼내고 있는 청년 시절의 황재형 작가. 허리춤에 헬멧 랜턴의 전지 상자를 차고 있다. 작가가 처음 내보인 사진이다.
1980년대 초반 태백 탄광촌 어귀에서 간이 캔버스를 놓고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황재형 작가의 모습.
<백두대간> <탄천의 노을>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듯 작가는 태백 광산촌 인근의 사람들과 자연 풍경에 바탕을 두고 그린다. 화폭의 세부에 서린 색과 필선은 광기에 가까운 기운을 업고 바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 칼날 같은 현실의 느낌을 담아 휘몰아치는 기세로 육박해온다. 극사실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이기도 한 그의 회화적 특징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작품의 현장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형상화했는가? 넉달여 만에 급조한데다, 판화와 걸개그림 등의 현장 양식은 쏙 빠진 이번 전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아 더욱 주체하기 어려운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길이다.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황 작가는 작업실의 구조와 작품들을 대략 소개한 뒤 나가자고 했다. “백두대간이 꿈틀거리는 곳으로 갑시다.” 답사의 시작은 10년 걸려 완성한 걸작 <백두대간>의 배경이 된 통동 통리재 고갯마루부터였다.
황재형의 풍경그림 작업을 대표하는 수작인 <백두대간>(1993~2004년).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인클라인 산악철도가 지나갔던 통리~도계 일대의 통리협곡과 겹쳐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들, 멀리 동해바다까지 하나의 구도 안에 조망되고 있다. 전통수묵산수화의 경쾌한 필획과 유화 특유의 두꺼운 마티에르(질감) 기법을 각고의 고뇌 끝에 한데 융합시켜 펼친 황재형 회화의 기념비에 해당할 만한 작품이다.
1989년 1월 어느 겨울밤 황 작가는 태백 시내에서 20여분 거리의 외곽에 위치한 통리재 고개에 올랐다. 시내에서 동료와 술을 마시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눈보라 몰아치던 통리협곡의 굽이치는 능선 속에서 백두대간의 진경을 눈과 피부로 함께 체험했다. 그 뒤로 마음이 외로울 때면 숱하게 통리재 고갯마루를 찾아가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눈의 허기를 달래며 사생했다. 작가의 1990년대 풍경화 작업을 대표하는 <백두대간>은 이때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993~2004년 10여년간 공 들여 덧칠한 작품이다. 여러겹 겹친 능선들이 동서 양쪽에서 위쪽 동해로 빠지는 협곡 아래로 치달리는 산세의 기운을 형상화했다.
<백두대간>의 배경인 통리재에서 황재형 작가가 멀리 동해까지 펼쳐진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능선들을 응시하고 있다.
지난 2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전시실의 개인전 ‘회천’에 내걸린 <백두대간>을 황재형 작가가 손으로 짚으며 살펴보고 있다.
이날 통리재에 설치된 스카이스테이션 전망대에서 백두대간 산줄기와 능선들을 응시하던 황 작가는 “우리 한반도 산하의 능선 줄기에서 뻗쳐나오는 내재적 힘을 형상화하려 애쓴 작품”이라고 했다. “단순한 선의 표현이 아니라 능선 사이, 능선 내부의 숲과 나무들의 율동을 주목했어요. 고향인 전남 보성의 판소리 선율이 들리는 듯했지요. 그걸 표현하려고 현대미술 화집을 뒤져보다 수묵화의 경지와 만나 선과 색이 기발하게 조응하는 중국 작가 저우춘야의 유화를 보고 공명했어요. 색선을 휘둘러도 붓자국이 어긋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법을 찾은 거지요.”
탄광촌 사택을 그린 2017년 작 <하모니카 나고야>. 2000년대 이후 사택촌 단지는 모두 철거돼 이런 풍경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붓질거리를 찾은 게 아니라 영혼이 다가왔을 뿐”
2000년대 이후 그린 <하모니카 나고야> <아랫목> 연작 등은 태백 광산촌 사택의 정경을 그렸다. 두툼한 물감 붓질로 핍진하게 묘사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일고여덟개의 출입문이 작고 좁아 하모니카 같은 건물이 줄줄이 이어진다고 해서 일본말로 ‘하모니카 나고야’라고 불렸던 태백 사택촌은 그에게 영감의 텃밭이 됐다. 사택촌은 고한, 사북, 장성 일대에 두루 퍼져 광산을 둘러싼 인근 산야를 가득 덮고 있었으나, 2000년대 이후 철거돼 더는 찾아볼 수 없다. 황 작가는 2017년 작 <하모니카 나고야>와 머리카락을 붙여 과거 사택촌 풍경을 묘사한 2018년 작 <나의 천국>(In My Heaven), 2004~2006년 그린 <아랫목2>를 통해 과거 탄광촌의 인간 풍경을 화폭에 아련하게 풀어놓았다.
머리카락을 붙여 과거 탄광 사택촌의 풍경을 묘사한 2018년 작 <나의 천국>(In My Heaven).
<아랫목2>. 2004~2006년 그린 것으로 탄광촌 주거지의 질박한 풍경을 물감층을 두껍게 발라 화폭 위에 풀어놓았다.
지난 26일 태백시 장성동 변두리 화신촌에 극히 일부만 남은 광산촌 자취를 황 작가, 그의 제자 박치형씨, 태백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권상동씨와 찾아갔다. 국내 최대 석탄광산이던 장성탄광영업소를 끼고 거대한 광부 주거단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황 작가가 1982년 9월 내려가 정착하기에 앞서 1979년부터 드나들면서 화구를 들고 작업하거나 눈을 붙였던 각고의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 집들이 온전히 서 있던 1980년대 초 그는 지독한 추위에 떨면서도 여기 나고야 가옥의 좁은 방 안에서 붓질을 거듭 놀리면서 광부 동료들과 손을 비비며 한 인간임을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지붕이 삭고 문틀만 남은 벽체 폐허의 들머리에 앉은 황 작가는 “집들의 문과 지붕이 유난히 낮고 좁은 건 탄가루와 한기가 조금이라도 적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했다. “단순히 작품감을 찾으러 돌면서 드로잉했던 게 결코 아니에요. 그 집의 낮은 지붕 자락에서 나와 다가오는 인간 영혼의 숨결과 호소를 몸으로 받아들여 바로 작품에 담아내려 온 신경을 집중했던 것이죠.”
태백시 장성동 일대에 폐허처럼 남아 있는 옛 광산촌 사택들.
장성동 옛 광산촌 골목의 계단에 앉은 황재형 작가가 주변 풍경을 사생하고 있다.
일행의 답사는 장성동의 도로 끝 카페에서 시작해 나고야 사택촌 흔적이 남은 화신촌 폐허 같은 흔적들을 지났다. 흥청거렸던 자취의 일부만 남은 부근의 옛 상가 골목 일대와 굴을 낀 술집이 있었던 용굴로 이어졌다. 황 작가는 “이곳의 벗겨진 판자와 벽체는 내 피부가 벗겨진 것과 같다”며 기자의 취재수첩에 직접 자신의 마음에 닿았던 상념과 감정들을 담아 골목길 어귀에서 즉석 풍경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황재형 작가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은 탄천의 노을>(2008). 고한읍 연탄공장 주변의 탄가루와 오물 뒤섞인 천에 비친 노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자신의 그림 배경이 된 탄천 일대를 찾은 황재형 작가. 13년 전 마지막으로 탄천 그림을 그렸을 때와 풍경이 크게 바뀌어 황 작가는 내내 어색해했다.
이날 오후 찾은, 걸작 <탄천의 노을>의 실제 배경인 북쪽 고한읍내의 탄천 물길은 실망감을 안겼다. 오물과 거뭇한 석탄물이 뒤섞였던 천의 물은 맑아졌으나, 배경이 됐던 연탄공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엇갈리게 건립돼 옛 풍경을 실감할 수 없었다. 황 작가는 천을 보며 외마디처럼 소리 질렀다. “그릴 때 (우리 광부들은) 살아 있다고, 존재한다고 외쳤던 거야. 태아 시체가 떠내려왔던 그 물결을 황금빛 노을로 칠하면서 생명의 희망이 있다고 절규했던 거라고! 제기랄!” 기록보고 문학의 대가이자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문인 조지 오웰은 1936년 영국 북부지역 노동계급의 생활상을 취재한 뒤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탄광노동자들의 노동을 다룬 꼭지 글에 이렇게 썼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탄광에 대한 모든 낭만적 해석을 넘어선 자리에 내 그림 본래의 자리가 있다”고 강조하는 황 작가의 견해나 그가 생각하는 작업의 의미 또한 오웰의 생각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동행한 일정 내내 도록과 전시에 표제어로 나온 ‘광부 화가’란 말에 진저리가 난다고 황 작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희에 다가선 지금도 그는 당당하고 거친 현장의 화가임을 자부한다. 자신의 작품을 광산촌의 슬픈 향수나 못 가진 자의 낭만 등으로 값싸게 치환시키거나 노동미술의 극점 등으로 전형화하는 시장과 평단, 대중의 선입관과 맞서며 세상 보는 사람들의 눈을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결기가 여전해 보였다. 노년에 접어든 그가 과거의 철저한 실천가적 삶대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황 작가는 “왜 인간이 죽도록 고통받으며 일하면서도 인권을 빼앗기고 희생당하는 현실이 지금도 비정규직 노동현장에서 이어지고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항변했다. 과거 탄광촌 사람과 풍경의 도상을 2010년대 이후에 창을 읊듯 율동치는 머리카락의 윤곽선으로 되살리는 이유는 그렇게 절박하고 필연적이다.
서울관 전시장 모습. 탄광촌의 풍광을 작품들 사이로 전시에 내놓은 그의 유일한 신작인 설치작품 <메탈지그(가짜 미끼)>가 보인다. 대중을 현혹하는 상품자본주의의 덫을 섬뜩할 만큼 과장된 가짜 미끼의 모습으로 상징한다.
소품이지만 황재형 작품세계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2004년 작 <우부>(愚夫). 생활고와 실직, 피폐해진 몸 등의 시련을 안고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과 그의 마음보를 일러주듯 솟구치는 길 위의 불꽃 같은 색선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개인전 ‘회천’의 들머리에 놓인 작가의 1983년 작 <목욕>.
그는 이번 서울관 전시에 신작을 단 한점 냈다.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상품 경제의 탐욕을 전시장 중간에 섬뜩할 정도로 큰 가짜 미끼인 메탈지그의 설치조형물을 놓아 상징화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1980~90년대 태백 광산촌의 사람들과 대자연의 모습을 희망과 가족의 의미를 담아 형상화한 구작들로 채웠다. 특히 명품 신발을 안 사준다고 학교에 안 가고 버티는 아이와 그를 지켜보는 부모의 줄다리기를 담은 광산촌 풍경 구작은 작지만 강렬한 감흥을 남긴다. 인문학자 칼 폴라니가 돈과 상품의 비인간적 탐욕성을 지칭하며 명명한 ‘사탄의 맷돌’을 작품 제목으로 붙인 것도 절묘하다. 27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 전시장까지 황 작가는 동행했다. 격렬한 비판과 호통을 섞으며 기자를 길라잡이 하던 그는 관람 말미 전시장 중앙 공간 벤치에 앉아 말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출품작들에 대해 ‘새로운 바로크적 상상력의 산물’이란 해석을 내놓은 기획자·평론가인 이영철 계원예술대 교수가 마침 현장에 찾아와 이야기 동무로 끼어든 것이다. 두 사람의 눈길은 한쪽 벽에 내걸린 <사탄의 맷돌>(2018)에 이어 부인의 외도를 눈치채고 절망에 휩싸여 걸어가는 광부의 뒷모습과 그의 뒤켠에 피어오른 불꽃 같은 감정의 색 덩어리를 그린 <우부(愚夫)>(2004) 앞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황 작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 희망을 일깨우는 그리기의 태도를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굳게 이를 앙다물었다. 태백/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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