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oeconomie.blogspot.com
김우재 ㅣ 초파리 유전학자 ‘과학문화’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 유행한 건, 박정희 시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 전후다. 1973년 박정희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주창한 이 운동은, 이후 과학풍토 조성사업의 전신이 되었다. 과총은 새마을기술봉사단을 만들어 박정희에게 동참했고, 양재동 한국과학기술회관을 건립했다. 과학문화라는 말이 등장하는 1967년 6월26일 <동아일보> 기사는 국립과학문화센터 설치 소식을 알린다. 당시 세워진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은 엉뚱하게도 훗날 과학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지금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되어 있다. 과학문화라는 말엔, 정치권력에 종속된 한국 과학기술인 사회의 비참한 역사와, 방향을 잃고 좌초해버린 한국 과학진흥의 비극이 녹아 있다. 과학문화 확산은 과학진흥운동의 한 부분이다. 영국에는 영국과학진흥협회 산하에 ‘대중의 과학이해’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고, 일본 역시 일본과학진흥기구 안에 과학대중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미국 역시 과학자들로 이사회가 구성된 미국과학재단 산하에 대중을 위한 과학문화 사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즉, 과학문화란 과학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존중받고, 과학자가 존경받는 직업으로 귀착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부산물인 것이다. 이런 순서조차 모른 채 정치과학자들과 관료들은 과학기술기본법에 과학문화의 확산과 창의적 인재 교육만을 담당하는 재단의 설립을 못박았다. 어떤 조직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철학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반드시 부패하고 흔들리게 된다. 지금 과학창의재단이 보여주는 내홍은 예견된 실패였다. 우리에겐 과학문화가 아니라 과학연구가, 과학관이 아니라 연구소가 더 필요하다. 이 차이를 모르는 한국 과학대중화 세력에겐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다. 첫째, 과학대중화의 수준이 일제 식민지 시대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각종 강연과 방송 출연 등의 쇼비즈니스로 대변되는 과학대중화의 수준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식민지 시기 계몽운동에 미치지 못한다. 둘째, 과학대중화를 과학지식의 전달로만 국한해서, 실제로 대중이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자로 사는 방식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다. 예를 들어 예술은, 강연과 공연을 넘어 직접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머리로 아는 교육’과 ‘몸으로 하는 교육’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과학대중화 세력은 오로지 쇼비즈니스에만 집착한다. 한국에서 과학문화를 주장하는 세력의 가장 심각한 셋째 문제는, 바로 그들이 사회화되지 않은 온실 속의 화초라는 점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사회 문제를 외면하고, 심지어 과학기술인들의 의견과 실천이 필요한 문제에서조차 거리를 둔다. 얼마 전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의 기록대로 지구의 역사를 왜곡하는 창조과학회와, 뇌호흡과 뇌파진동이라는 비과학적 개념으로 제도권 뇌과학계에 발을 걸치려던 유사과학단체가 나를 고소한 일이 있었다. 과학문화의 확산을 외치던 한국과학창의재단도, 과학대중화를 외치던 연예인급 과학자들이 모인 과학동호회도, 심지어 유사과학단체의 행사를 실수로 지원하려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고소당한 과학자를 위해 단 하나의 성명서도 내지 않았다. 한국의 과학문화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지 않는다. 사회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과학대중화를 부처의 핵심사업으로 여기던 유영민 전 과기정통부 장관은, 창조과학자와 함께 쓴 책으로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고, 진화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면, 황우석 사태, 광우병 촛불시위, 창조과학자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 사태 등에서, 과학문화를 말하던 대중과학자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온실 속의 화초에 불과하다. 즉, 그들은 잡초가 되어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될 수 없다.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성의 결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과학문화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는 온실 속의 과학문화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또 다른 상아탑을 쌓아올릴 뿐이다.
Let's block ads! (Why?)
August 03, 2020 at 04:35PM
https://ift.tt/3gjGlHg
[숨&결] 온실 속의 과학문화 / 김우재 - 한겨레
https://ift.tt/2XUmXd9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숨&결] 온실 속의 과학문화 / 김우재 - 한겨레"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