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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후 보세요. 얼마나 맞는지”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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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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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발랄한 명리학 5. 랜선 사주의 세계 전국 방방곡곡에 사주 단골집이 있다는 친구가 있다. 일상에 지칠 땐 부산에 가서 밀면, 돼지국밥, 회를 실컷 먹고 근처에 유명하다는 곳에 들러 사주를 보면 1박2일 힐링 패키지로 딱 알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는 부산, 춘천, 공주, 목포, 전국 팔도에 단골 사주집이 있었다. 몇년 전 제주도에 갔다가 친구처럼 나도 단골집이 생겼다. 머리를 식힐 겸 그저 바다를 보러 간 것인데 역시 사주는 휴가지에서 보는 게 제맛이다. 일상을 내려놓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충전을 하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마다 제주도에 갈 때면 힐링을 위해 사주를 보곤 했다. 올해는 태풍으로 바닷길이 막혀버린 터라 제주도 사주 상담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단골 상담가와 통화하게 됐다. 그분은 태풍은 둘째 치고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올해부터 대면 상담은 일절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업을 이어가시냐 했더니, 전부 비대면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온라인 주소를 띄워줄 테니 그리로 접속하라고 했다. 안내받은 앱을 깔고 버튼을 몇개 누르니 상담가와 나만 접속한 방이 떴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내 사주팔자가 쓰인 큰 칠판과 움직이는 빨간 펜이 나타났다. 스피커 모드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온라인 칠판에 그분이 써 내려가는 이런저런 글씨를 보노라니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내년 한해 사주를 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내가 2~3년간 겪을 세운을 꼼꼼히 풀어준 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문자 한통을 보냈다. “이 영상을 몇년 후에 보세요. (지금 예측이) 나중에 얼마나 맞는지.” 문자엔 녹화된 영상을 언제든 접속해 다시 볼 수 있는 유아르엘(URL) 주소가 담겼다. 대면 활동을 막아버린 코로나19가 세상 만물을 바꾸었는데, 사주 상담 문화도 그중 하나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사주 상담가들은 원격 상담으로 많이들 갈아탔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다. 낯선 이에게 내 신변 이것저것을 털어놓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직접 찾아가기보다 이메일 상담이나 온라인 상담, 쉽게 말해 ‘랜선 사주’로 진작 갈아탔다. 랜선 사주의 세계에선 여러 상담가들이 자신의 경력과 강점이 적힌 프로필을 내걸고 수요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별점 평가로 점수가 바로 뜨는데다 호평과 혹평이 섞인 이용자들의 생생한 후기도 피할 수 없다. 전국 어느 지역에 있든 사주로 먹고사는 이들이 온라인 세계에서 경쟁하는 셈이다. 얼마 전 ‘랜선 사주로 집에서 편하게 사주 보세요’란 서비스가 있길래 구매해보았다. 한번 듣고 나오면 잊어버리는 사주풀이가 아니라 두고두고 문서를 보며 자신의 사주를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콘셉트였다. 서비스 설명 문구를 보니 “단순히 ‘재물운이 좋다’가 아니라 ‘이러이러한 명리학적 이유 때문에 재물이 어떻게 들어온다’고 설명한다”고 했다. 그럴듯한 소개글에 혹한 나는 곧바로 구매를 선택했다. 생년월일시를 전송하니 얼마 뒤 손글씨로 꼼꼼히 적힌 세장가량의 문서가 왔다. 무턱대고 ‘운이 사납다’ ‘부적을 만들어야 겨우 면한다’가 아니라 명리학 이론에 근거해 운이 나쁘면 언제, 왜 나쁜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설명이 쓰여 있다. 랜선 사주의 세계는 부담스러운 대면을 피하는 것 외에도 우리나라 사주 문화의 판을 바꾸고 있다. 고객에게 이런저런 호통을 치며 으름장을 놓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이메일이라면 글자가 남고, 화상통화라면 영상이 남는다. 이런 기록들은 사주풀이 때 상담가가 한 말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주 상담가는 근거 없이 이런저런 말을 꿰맞추거나 적당히 때려 맞히기 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랜선 위에서라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던 사람들이 정리될 것이다. 고객이 몇년 뒤 다시 기록을 들춰봤을 때, 대단한 적중까진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되어야 다시 찾아갈 거니까. 봄날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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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2, 2020 at 07:1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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